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국공합작 (문단 편집) === [[중국공산당]]의 등장 === [[천두슈]]와 [[리다자오]]는 1918년 봄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설립했으며 1919년 베이징에서 사회주의 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닌 무정부의자, 조합주의자, 생디칼리스트들이 섞인 복잡한 조직이었으나 1920년 5월 코민테른 대표 그리고리 보이틴스키와 양명제의 지원으로 공산주의 클럽이 상하이에서 창설되었고 9월 베이징, 연말에 광저우까지 지부를 만들었다. 1920년 6월, [[블라디미르 레닌]]은 코민테른 제2차 대표대회에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제시하여 "코민테른은 식민지 및 낙후한 나라들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와 임시적 동맹을 맺되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 되며 가장 맹아적인 형태에 있어서까지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독자성을 무조건적으로 보전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여 통일전선을 통한 동아시아에서의 혁명을 추진했다. 1921년 6월 3일 코민테른 주중국대표 마링이 상하이에 도착하여 원동서기처 니콜스키와 만나 이한준과 이달에게 중국공산당의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해 상하이 서기 대리 이달이 6월 20일을 대회 일자로 잡고 100원의 여비를 보내며 각지의 공산주의 소조에서 대표 2명씩 상하이에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7월 23일[* 중국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7월 1일인데 이는 마오쩌둥이 1938년 5월 연안에서 주장한 날짜고 1940년 중국공산당은 이를 수용하여 7월 1일을 공식 대표대회일로 잡았다. [[에드거 스노우]]는 5월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에드거 스노우의 오류다.]에야 각지의 대표가 모이게 되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망지로 106호의 이한준의 집에서[* 여학교였다는 설도 있다.] 제1차 전국대표대회, 약칭 1전 대회가 비밀리에 소집되었다. 대회를 지도한 것은 코민테른 대표와 마링과 니콜스키였고 참가자들은 7개 조직, 50여명의 당원을 대표한 13명이었다.[* 11명설, 12명설도 있는데 현재는 12명설이 유행하지만 볼셰비키측 인사들을 포함해 15명이 참석한 것이 확실하다.] 이중에는 후일 탈당한 광동대표 [[천궁보]], 일본대표 [[저우포하이]], 베이징 대표 [[장궈타오]]를 포함하여 상하이 대표 이달, 호남대표 [[마오쩌둥]], 우한대표 진담추, 우한대표 [[둥비우]], 산동대표 등은명, 상하이 대표 이한준, 유인정, 왕진미, 하숙형, 천두슈의 대리인 포혜증 등이 참여하였다. 회의 도중인 7월 30일 프랑스 조계지 경찰이 회의장을 수색하는 통에 대표들은 8월 1일 마지막 회의 장소를 절강성 가흥현 남호위의 유람선으로 정하여 그곳에서 폐회했다. 이들은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이라는 당명을 정하고 무산계급의 혁명군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무너뜨리고 무산계급 전정과 사유재산 폐지, 계급차별 소멸을 천명했다. 중앙국이 설치되었고 천두슈가 총서기, 장궈타오가 조직주임, 이달이 선전주임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세력이 미약하였고 크렘린의 평가도 좋지 않았다.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카를 라데크(Karl Berngardovich Radek)는 중국 공산당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동지들, 장밋빛 꿈속에 빠지지 마시오. 당신들의 힘을 과대평가하지 마시오. '우리 중국인 동지가 이 자리에서 뿌리를 강하게 내리고 있다'라고 말할 대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친애하는 동지여, 일을 시작할 때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만 합니다.' 광동이나 상하이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의 동지들은 노동자 계급과 연합하는데 실패했습니다. (...) 그외의 많은 동지들은 그들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어 마치 한때 공자를 연구했듯이 마르크스와 레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동지들, 사회주의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의문은 이제 일상적인 행사가 아님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 우리의 당면과제는 첫째, 젊은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는 것, 둘째, 유럽과 아시아의 제국주의에 투쟁하기 위하여 혁명적 부르주아 요소와의 관계를 규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혁명적 부르주아 요소'와의 동맹이 [[소련]]이 추구하던 바였다. 1921년 6~7월 코민테른의 제3차 당대회는 후퇴기 전술을 제시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 방침을 채택했다. 볼셰비키는 [[직예군벌]]의 실질적인 수령 [[우페이푸]]나 광동군벌 [[천중밍]] 등의 '혁명적' 군벌과 접촉했고[* 천두슈는 천중밍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며 천중밍과 함께 광동성 교육개혁에 착수한 바가 있다. 우페이푸 역시 소련의 지도를 받아 노동법을 입법하는 등 친노동자 정책을 일부 시행했다.] [[쑨원]]의 [[중국국민당]]에게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2차 대표대회 이후 코민테른에 가입한 중국 공산당은 부르주아들과의 동맹을 요구하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국공합작의 시작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